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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5 & 화성-6 본문

북한관련/발사체

화성-5 & 화성-6

빛나는 전구 2025. 4. 12. 17:39

스커드 계열 (화성-5와 화성-6)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로켓 및 미사일 분야에 처음 뛰어들었다.1965년 무렵에 김일성 정권 아래 북한은 독자적인 탄도미사일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로 한다. 그 결과 그 해에 함흥군사학원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미사일 개발과 관련 교육 및 훈련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0년대에 북한은 로켓, 지대공 미사일, 대함 미사일을 공급하고, 미사일 프로그램을 위한 인적 자원 개발을 시작했다.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에 북한의 군사비는 총 국가예산의 약 30%까지 증가하였다.)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결심한 이유는 첫 번째, 1950년대 말 중국과 소련의 갈등(중소결렬) 그리고 1962년에 일어난 쿠바 미사일 위기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앞선 두 사건을 통해 북한은 남한과의 군사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이나 소련이 북한을 지원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줄어들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1960년대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지대함 미사일 및 FROG-5/7 미사일(사거리 100km 이내)을 확보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지대함 미사일, 지대공 미사일 및 기술 지원을 제공 받았다. 1971년 9월 경에 북한은 탄도미사일 및 다른 무기체계를 획득, 개발 및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과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협력은 북한의 기술자들이 중국 DF-61 미사일을 개발하는 협력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1977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1975년 4월 17일, 김정은은 중국을 방문하여 탄도 미사일 개발 기술 이전을 요청했고, 그 결과물이 DF-61 미사일 공동 개발이었다. 당시 프로그램 책임자는 중국의 진석련 장군이었는데, 진석련 장군이 문화대혁명 때 정치적으로 축출되는 바람에 1978년, DF-61 프로그램이 중단됐다. 그러나 북한은 이 과정에서 잠시나마 참여하여 미사일 유도 기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중국에 파견된 북한 기술자들은 중국에 남아 중국으로부터 미사일 설계에 관한 기술 및 지식을 계속 습득할 수 있었다.

 

FROG, Free Rocket Over Ground의 약자이며 북한은 프로그 -5 미사일을 '화성-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를 개량한 미사일(또는 프로그-7)을 '화성-3'이라고 불렀다. 북한이 지대지 미사일에 '화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점에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지대공 미사일에 대해 화성-2, 화성-4라고 부르는 것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지대공 미사일에 대해 '번개'라는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SA-2 지대공 미사일은 '번개-1'이라 하고, SA-3 지대공 미사일을 '번개-3'이라고 한다.

 

1960년대 소련은 북한에 미사일 관련 기술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다보니 북한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이집트로부터 스커드 B 미사일(사거리 300km, 참고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200km 조금 안된다.)을 입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미사일 개발 및 생산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1985년에 이란과 합의문에 서명하였다. 그 결과 북한은 1984년에 스커드 B를 복제한 화성 5형 미사일을 개발 및 생산 후 비행시험을 실시한다. 그리고 북한은 이란의 지원을 받은 보답으로 이란에 자신들이 복제한 소련제 탄도 미사일을 판매했고, 이란은 '샤하브-2'라는 이름으로 운용했다. 덕분에 당시 이라크와 전쟁 중이었던 이란은 저렴한 가격에 미사일을 확보할 수 있었고, 북한은 미사일 생산의 경제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외화를 확보하게 된다. 더불어 이란이 발사하면서 얻은 수많은 데이터 또한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는 1979년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으며 친미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덕분에 1982년에 미국으로부터 F-16A/B Block 15 전투기를 도입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F-16C/D Block 32 등을 도입하게 된다. 추가로, 북한은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 군인을 파병했다. 그래서 이집트는 본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그리고 더 이상은 사용하지 않을 소련제 무기 중 하나인 스커드 미사일을 북한에 제공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남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1978년 9월 26일, 백곰 미사일이 충남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관하는 가운데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그리고 1979년 10월에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합의되면서 한국은 사거리 180km, 탄두 중량 500kg 이내의 미사일만을 개발하도록 제한을 받게 된다. (1차 한미 미사일 지침) 이때 사거리 180km는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본토에서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이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에 10.26 사태라고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이 일어나며 곧바로 12.12. 사태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된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인정을 받고자 또는 협력을 위해 백곰 미사일을 비롯한 미사일 개발 사업을 전면 중단한다. 1983년 10월 미얀마(당시에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는 목적으로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현무 미사일 개발에 착수한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북한은 화성 5형 미사일 관련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양산 체제에 돌입한다. 1987년 이후로는 월 8~10기의 미사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북한은 스커드 C 미사일을 복제한 (사거리 500km, 참고로 평양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500km 정도이다.) '화성 6형' 개발에 착수한다. 그리고 동시에 1980년대 말 준중거리탄도미사일(MRBM)에 해당하는 노동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사거리 1,000~1,500km)을 시작한다. 이러한 개발 속도는 전례를 찾아 보기 어려우며 특히 북한의 경제적 기술적인 수준을 고려한다면 더욱 이례적이다. 따라서, 북한의 급격한 미사일 개발에는 높은 수준의 해외 기술 지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바로, 1991년에 붕괴한 소련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북한은 1991년에 소련 붕괴로 실업자가 된 구소련의 탄도미사일 로켓 기술자들과 핵 관련 기술자들을 대거 북한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3년 5월 31일, 동해상으로 노동 1호 1단 추진체 발사시험을 실시했다. 다음 글에서 다루겠지만, 노동 미사일은 이후 중동 국가에 판매되어 이란의 '샤하브-3' 미사일과 개량형인 샤하브-3B, 또는 '가드르-110' 미사일, 그리고 파키스탄의 '가우리-1' 미사일이 된다.

 

참고자료

북한 탄도미사일의 모든 것 <1> 초창기의 개발 역사

조갑제닷컴 김일성, 1975년 중국에 '미사일 기술' 이전 요청

월간조선 [北미사일 도발 정밀분석] 김정은의 미사일 도발 야욕, 종착역은 어딜까?

동아사이언스 [北미사일 집중점검(1)] 북한, 1970년대부터 시작한 기술 자립 꿈꿔와

Arms Control Work, The Hwasong That Never Ends by Scott LaFoy (2017)

역사기술우주, 북한 미사일 개발사. 2편. 북한 장거리 미사일, 화성5호, 스커드 미사일

나무위키, 북한의 미사일 개발

THE SSEN LIG, 북한의 KN시리즈 미사일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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