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rchive
이탈리아 Fiat G.95 (1963) 본문
NBMR-3 사업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NBMR-1 사업에서 승리한 자신들의 피아트(Fiat) G.91 경공격기를 기반으로 수직이착륙기를 개발하려고 했다. 이들은 동체 하부에 이륙보조엔진을 더하여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경공격기를 구상했다. 그러나 NBMR-3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제대로 충족하기 위해서는 단거리 이착륙이 아닌 수직이착륙이었으므로 익단에 2기의 추진용 제트 엔진을 가지며 동시에 수직이착륙을 위한 4기의 엔진을 전방과 후방에 각각 2개씩 설치한 Fiat G.95/3 디자인을 구상하게 된다.
이후에는 NBMR-3a 사업의 요구조건인 초음속 비행 또한 가능하도록 Fiat G.95/3을 한단계 발전시킨 Fiat G.95/6 모델을 구상한다. Fiat G.95/6은 초음속 비행이 가능하도록 수평비행을 위한 제트엔진이 대형화되었다. 이에 따라 무거워진 동체를 수직이착륙 시킬 수 있도록 수직이착륙 엔진 역시 전방과 후방에 각 1기씩 추가되어 무려 6개의 제트 엔진이 수직이착륙만을 위해 동체에 삽입되었다. 게다가 수평비행까지 고려하면 동체 전방에 3기, 후방에 3기, 수평 비행을 위한 제트엔진 2기까지 총 8기의 엔진이 하나의 기체에 탑재되는 셈이었다. 당연히 동체 내부에 작전 수행을 위한 연료탑재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동체 길이가 늘어나 우스겟소리로 날으는 소세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Fiat G.95가 채택한 수직이착륙 및 수평비행용 엔진 분리 방식은 상대적으로 기술적 난이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으나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하나의 기체에 과하게 많은 제트 엔진이 탑재되면서 유지 보수가 끔찍하게 어려워진다. 이탈리아에서 구상한 Fiat G.95 전투기만 보아도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G.95/6 설계안은 제트 엔진이 무려 8개나 탑재된다. 두 번째, 수직이착륙할 때를 제외하면 사용되지 않는 6기의 엔진들은 항공기의 공허중량을 늘릴 뿐이며 내부연료탑재량을 제한시킨다. 이는 자연스럽게 작전운용 시 항공기의 항속거리나 무장에 제약을 가져온다. 그러다보니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에서도 이러한 방식들이 검토된 적이 있으나 실용적이지 않았기에 단 한대도 양산에 들어가지 못한 채 사업이 중단되었다.
물론, 이탈리아 엔지니어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이러한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수평비행용 엔진과 수직이착륙용 엔진을 구분한 이유는 이 방식이 기술적 난이도는 낮으면서 수직이착륙이 가능하며 동시에 초음속 비행까지 가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는 냉전의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였으므로 앞서 말한 요구조건들은 항공기의 운용유지비용, 항속거리 및 무장 제한이라는 단점을 감수할 만큼 중요했다. 그래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이탈리아 항공설계자 Gabrielli는 나름의 타협안으로 무게중심 위치에 4개의 수직이착륙 엔진을 탑재하는 모델 G.95/4를 고안했다. 그는 마하2급 수직이착륙기 개발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최고속도를 마하 1에서 마하 1.3 정도로 낮춘 모델을 제안한 것이다.
당시 엔진은 수직이착륙을 위해 영국 롤스로이스의 RB.162 엔진을 탑재하며, 수평비행을 위해 RB.153 엔진이 탑재될 예정이었다. 여러 사진 자료를 보면 1960년대 초반에는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63년에는 이탈리아 공군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수평비행은 불가능하나 수직이착륙은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 기체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수직이착륙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엔진을 여럿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개발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의 수직이착륙기 전투기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더 유망하다고 판단하여 피아트(Fiat)는 1964년 4월에 서독의 수직이착륙기 VAK 191B 개발에 참여하고, 1965년에 와서 Fiat G.95 사업은 중단되었다.
참고로, Fiat의 수장이었던 Vittorio Valletta는 1967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피아트가 항공산업에 손을 떼면 단순한 자동차 회사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항공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등장하는 Agnelli은 1967년에 독일과 공동개발하고 있던 VAK 191B 사업에서 이탈하는 등 항공산업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 하다. 시기적으로 1960년대는 피아트의 전성기라고 하는데 이때 피아트는 자신들의 항공부문을 국영 이탈리아 산업재건연구소(IRI, 이탈리아어로는 'Istituto per la Ricostruzione Industriale'이고, 영어로는 'Italian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이다.)의 핀메카니카와 함께 합병하여 아리탈리아(Aeritalia)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피아트의 아리탈리아가 아닌 IRI의 아리탈리아라고 표현되는 것과 다양한 자동차 회사들과 합병한 것을 보면 이후로 피아트는 자동차 분야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IRI는 1969년에 항공우주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핀메카니카와 피아트의 항공우주 분야를 합병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60년대 후반 항공업계들 사이에서 주요한 합병들이 여럿 이루어졌다. 1967년에는 프랑스, 영국 그리고 서독이 에어버스(Airbus)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의 보잉에 대항하고자 했으며, 1967년에 맥도넬과 더글러스 역시 합병 절차를 밟아 맥도넬 더글러스를 출범시켜 보잉에 대응하고자 했다.
1960년대는 피아트에게 황금시대였다. 이때 피아트는 OM, 아우토비앙키, 란치아 등을 흡수하고 페라리에도 출자했으며 또 해외진출에도 힘을 쏟아 동유럽, 소련에도 라이선스 생산권을 주며 부품을 공급했다. 그러나 1970년대 1차 석유파동(1973)에 따른 경기후퇴로 생산, 판매가 모두 감소했다. 이후에 생산량은 소폭 증가했으나 1980년대까지 낮은 생산량을 유지했다. 이는 다각화를 중시한 피아트가 자동차 부문에서의 투자를 억제했기 때문에 승용차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원인이라고 [글로벌오토뉴스]는 평가했다.
피아트는 69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다른 자동차 메이커를 비롯해 부품 메이커, 원재료 연관 메이커 등을 다수 흡수하고 합병했으며 1967년에는 OM S.p.A (상용차회사), 68년에는 오토비앙키 S.p.A.에 자본 참여하는 방식으로 자회사화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고급 자동차 메이커인 란치아와 페라리를 매수해 이탈리아 자동차 생산의 90%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만 보면 1960년대 중반부터 피아트는 항공산업보다 자동차 산업에 집중하려는 듯한 행보로 해석된다.)
사업 및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피아트 역시 사업 확장을 멈추고 구조조정 및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Commpes 그룹 내의 우주항공, 에너지, 방위관련사업을 피아트 그룹에서 분리하여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항공기 사업에서 손을 땐 것도 이때라고 [글로벌오토뉴스]는 전했다.
참고자료
네이버 블로그 쿵디담, 이탈리아 VTOL 전투기 - 피아트 G.95 (2022)
Wikipedia (Italiy) Fiat G.95
WW2aircraft.net - The Fiat G.95 Project (2021)
Secret Projects Forum, Fiat G.95 V/STOL attack fighter (2006)
Hush-Kit, Sixties Superfighters: The Original JSF- the Italian V/STOL FIAT G.95 ‘Resistenza’ (2012)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레오나르도 (2018)
글로벌오토뉴스, 피아트, 디자인의 나라 이탈리아 정신이 창조한 브랜드 (2012)
'무기체계 > 유럽공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후 서독 공군 (1956) (0) | 2023.10.07 |
---|---|
EWR VJ101 (1963) (0) | 202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