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rchive
EWR VJ101 (1963) 본문
1960년대 서독 공군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는 공산 국가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대응 능력이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당시 서독은 자신들의 모든 공항이 공산권 국가의 타격 범위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비행장이 마비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활주로가 파괴되어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수직이착륙기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더불어 나중에 독일이 운용하는 마하 2급 초음속 요격기인 F-104G를 대체할 차세대 요격기를 고려해서라도 관련 기술을 개발 및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1960년대 항공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어느 나라가 최초로 초음속 수직이착륙기를 개발할지를 두고 열띤 논의와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에서 1960년대 P.1127 Kestrel 기술실증기를 통해 수직이착륙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50년대 소리의 벽을 돌파하기 위해 제트 엔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진 덕에 1960년에 와서는 충분히 강력한 추력을 낼 수 있는 엔진들이 다수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 만능주의와 함께 1970년대 석유 파동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므로 지금보다 연비에 대한 제약이 적었다. (예를 들면 1960년대에 개발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있다.) 더 나아가 냉전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로 소련이 미사일로 활주로를 파괴한 경우에도 소련에 대한 핵보복을 위해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항공기 개발은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서독을 비롯한 다양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기존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에서 개발한 G.91 경공격기를 대체할 차세대 경공격기 도입 및 개발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서독은 나토군의 NATO Basic Military Requirement, NBMR-3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경공격기 개발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때 마하 2급 요격기를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하는 전투기는 NBMR-3에서 제시하는 G.91 경공격기를 대체할 차세대 항공기와 구분하기로 한다. 그래서 초음속 비행이 가능하며 F-104G를 대체할 NMBR-3A와 차세대 수직이착륙 경공격기 개발이 목적인 NMBR-3B로 나뉘게 된다.
사업이 시작되자 항공기 개발에 일가견이 있는 국가들과 기업들은 자국 요구조건에 맞는 수직이착륙 전투기 개발안을 하나둘 제안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개발한 P.1127 Kestrel을 기반으로 하여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P.1154 모델을 제안했고, 사업 내에서는 'VAK 191A'으로 불렸다. 서독은 수직이착륙 항공기 개발에 큰 관심을 가졌던만큼 두 회사에서 두 개의 설계안을 제안했다. 하나는 VFW(Vereinigte Flugtechnische Werke)에서 제안한 'VAK 191B' 모델이었다. 영국이 제안한 모델과 비슷한 형상을 가진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EWR(Entwicklungsring Süd)에서 제안한 'VAK 191C' 모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피아트의 G.95 모델을 'VAK 191D'로 제안했는데, 서독 정부의 VAK 191B 개발 사업에 공동개발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더 유망하다고 판단하여 자체개발 계획을 철회하였다. 이중에서 해당 페이지에서 다룰 내용은 EWR에서 설계한 VAK 191C 모델이다.
1950년대 말 서독 연방정부는 단순히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전투기가 아니라 당대 마하 2로 비행하는 요격기에 맞먹는 성능을 갖춘 제대로 된 수직이착륙기를 원했다. 그래서 서독 내 여러 항공업체에서 우후죽순으로 개발하는 것을 제한하고 국내 항공업체들을 하나로 묶어 기술이 집약되도록 지시했다. 이에 1957년에 메서슈미트, 뵐코프, 그리고 하인켈이 통합하여 '남부 개발지대 연합업체'라는 의미의 EWR (Entwicklungsring Süd, EWR)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설계한 VAK 191C는 서독 정부로부터 개발 지원을 받는 국책사업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1950년대 말 하인켈이 설계한 He.231은 'VJ 101A'가 되고, 메서슈미트가 설계한 P.1227은 'VJ 101B'이 되었고, EWR이 설계한 모델이 바로 'VJ 101C'이다. 그리고 EWR은 최종적으로 양산할 모델에 대해 'VJ 101D'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었다. 이때 'VJ'는 독일어 Vertikal-Jäger(수직전투기) 또는 Versuchs-Jäger(시제전투기)를 의미한다.
항공기 제작에 앞서 독일은 개념 테스트 및 비행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고자 '시소(wippe)'라는 테스트 설비를 제작하였다. 지상에 묶여 있는 이 테스트 설비는 처음에는 롤스로이스 RB.108 엔진 하나를 가지며 전혀 항공기처럼 보이지 않는 외관을 가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VJ 101C의 뼈대에 3기의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발전하였고, 1961년 5월부터 진행된 실험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었고 1962년 3월에는 수직이착륙에 성공하였다.
기술 평가 및 비행 특성을 수집할 목적으로 개발된 wippe에는 3개의 엔진이 탑재되었지만, 실제 수직이착륙과 초음속 비행 시험을 수행할 VJ 101C 기술실증기는 무려 6개의 엔진을 탑재되었다. 양 날개 끝에 수직 및 수평 비행에 필요한 추력을 제공할 엔진이 2기씩 장착되고 동체 한가운데에 호버링을 돕는 2기의 리프팅 엔진이 증설되어 있었다. 이때 엔진은 독일의 MAN과 영국의 Rolls-Royce가 공동개발한 RB.145이 탑재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6개의 엔진을 적절하게 제어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그리고 수직비행에서 수평비행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섬세한 추력 제어를 위해 컴퓨터 제어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한 전자식 제어 시스템 '플라이-바이-와이어'는 미국의 Honeywell과 독일의 Bodenseewerk가 공동개발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독의 수직이착륙기 개발 사업은 영국으로부터 엔진 제어 프로그램, 비행 조종 장치, 사출 좌석을 지원 받았으며,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며 서독의 VJ 101C는 '꿈의 전투기(Traumjager)'라고 불리며 크게 주목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EWR은 두 종류의 시제기를 개발했다. 하나는 RB.145 엔진을 탑재한 일반형이고, 다른 하나는 애프터 버너를 기능을 탑재한 초음속 비행 시험형이었다.
1963년 4월 10일
첫 번째 시제기(X-1 기체번호: 9517)가 호버링에 성공하였다. 조종은 과거 미국의 수직이착륙 시험기체였던 Hiller X-13을 조종한 경험이 있는 미국인 시험비행 조종사가 맡았다.
1963년 9월 20일
첫 번째 시제기가 수직이착륙한 뒤 수평 비행으로 전환에 성공하였다.
1964년 7월 29일
후기 연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마하 1.04로 비행하며 제한적인 슈퍼 크루즈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수직이착륙기가 처음으로 소리의 벽을 돌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64년 9월 14일
수직이착륙이 아닌 활주로에서 통상적인 이륙을 하던 도중 자동 조종장치의 결함으로 통제 불능에 빠져 나무 꼭대기에 해당하는 초저공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제로-제로 사출좌석 덕분에 조종사 George Bright는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낙하산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감속에 실패하여 조종사의 척추가 크게 다쳤다. 이를 두고 그는 "우리들이 설계한 자동조종장치는 '침대틀(bedstead)'로 시험한 비행특성을 기반으로 짜여졌고 실제 항공기와 유사할 것이라 판단했다. 문제는 항공기의 비행 특성은 테스트 장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의역하자면 침대틀처럼 생긴 장치에서 얻은 데이터로 항공기를 조종하려고 했으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1965년 6월 12일
두 번째 시제기(X-2 기체번호: 9518)가 초도비행에 성공하였다. 2호기에는 후기 연소가 가능한 엔진이 탑재되어 1호기보다 엔진 추력이 뛰어나 보다 안정적인 비행이 가능했다. 2호기에는 새로운 비행조종장치와 함께 3중 백업 시스템을 갖춰 안정성을 보강하였다.
1965년 10월 22일
새롭게 설계된 자동조종장치(오토파일럿)을 탑재한 2호기가 성공적으로 천이비행에 성공하였다. 이때 2호기는 수직으로 이륙하여 수평 비행으로 전환한 뒤 다시 수직으로 착륙하는데 성공하였다.
1967년
6개의 엔진에서 나오는 고온의 배기가스가 지면으로부터 반사되어 다시 엔진으로 유입되었고, 이 때문에 엔진의 추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엔진의 추력이 갑자기 줄어들자 기체는 감속에 실패하여 지면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는다. (참고로, 고온의 가스가 다시 공기흡입구로 들어오는 현상은 많은 수직이착륙 전투기들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이다.)
<정리중>
1966년에 미국은 독일에 합작을 제안한다. 미국과 독일은 NATO군이 다량 운용하고 있는 F-104G를 대체할 수직이착륙 전투기를 함께 개발하기로 한다. 선진 수직이착륙 공격 전투기, Advanced Verical Strike Figther, AVS 사업.
EWR은 미국의 Fairchild와 함께 X2 전투기를 기반으로 하는 시제기 연구에 착수한다.
그러나 2대의 시제기 개발과 엔진 개량에 6,000만 달러를 지출한 상황에서 AVS 프로그램을 추가로 진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영국제 해리어를 수직이착륙기로 도입하여 만족스럽게 운용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다.
일련의 성공적인 비행 결과에 3번째 시제기는 복좌형으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요격 임무 수행을 염두에 두고 설계가 진행되었던 VJ 101은 서독 정부에 의해 다목적 임무수행이 가능한 전투기로 변경되면서 난항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D형은 C형과 전혀 다른 외형을 가지게 된다. C형이 양날개 끝에 2기의 육중한 엔진을 탑재한데 반해 D형은 엔진이 모두 동체 내부로 들어갔고 이 상태에서 수직이착륙을 위해 엔진 노즐이 수직으로 꺾이는 추력편향노즐 설계가 적용되었다. 요격기라면 수직으로 이륙하여 빠르게 상승한 뒤 폭격기를 요격하는 단조로운 비행 궤적 및 기동을 요구되지만, 다목적 임무 수행을 위한 비행에서는 그렇지 않으므로 무거운 엔진을 날개 끝을 두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본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임무 요구도가 변경되면서 전면적인 설계 수정이 들어갔고, 기술적으로 더욱 구현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면서 개발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승하는 개발비용도 문제였다. 1968년 프로그램이 중단된 시점에서 서독 연방정부는 VJ 101C 개발을 위해 245만 마르크를 투입하였다. (2대의 시제기에 3,125만 달러를 지출했으며, 엔진 개량 및 제작에 별도로 3,000만 달러를 쏟아부었는데 이미 정부가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었다.)
시대적 분위기도 독일의 수직이착륙 전투기 개발을 가로막았다. 1960년대 말부터 미사일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여 탄도탄이 주요 핵투발 수단이 된 것이다. 이제 소련은 폭격기를 사용해 서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탄도탄을 발사할 가능성이 더 높았고, 서독 공군 역시 전투기를 출격시켜 소련을 공격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자 독일 공군은 예산 부족과 초음속 전투기의 전력화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1960년대 중반부터 F-104G 전투기 도입 및 면허생산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며 독자적인 초음속 수직이착륙 전투기 사업에 흥미를 잃고 만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서독의 수직이착륙기는 그 목표가 너무 높았다. 영국은 전선 간이 비행장에서 운용이 가능한 경공격 수직이착륙기를 목표로 잡았으나 서독은 마하1.8급 초음속 수직이착륙기를 목표로 했다. 당시 F-104G가 고도 5만피트까지 도달하는데 140초가 소요된 반면, VJ 101은 6만 5,600피트까지 90초 이내에 도달할 것이 요구되었다. 마하2.5에 이정도 상승 성능이라면 1960년대 기술 수준으로는 최상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업은 1968년에 중단되었다.
만약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F-104G를 대체할 전투기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양산되지는 못했지만 항공 역사상 최초로 수직이착륙기가 마하 2급 비행성능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전범기업이었던 Messerschmitt와 Heinkel에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군재건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1955년에 나토에 가입하면서 서독은 동독과 국경을 맞댄 자유진영의 핵심국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방산업체에 대한 제재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이들은 다시 항공산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Heinkel은 미국의 F-104 스타파이터 면허생산권을 얻어 항공산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1950년대말 독자적인 수직이착륙기 설계안을 만들었다.
Vertikalstartendes Aufklärungs- und Kampfflugzeug (Vertical Take-off Reconnaissance and Strike Aircraft)
1964년에 하인켈이 컨소시엄에서 나갔다고 한다.
총 115개의 기업(35개의 영국 기업, 60개의 미국 기업 그리고 20개의 프랑스 기업)이 참여한 사업이었다.
2,750 파운드 / 3,550 파운드 추력
참고자료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VJ 101 수직이착륙 전투기」
네이버 블로그, 쿵디담 「서독이 낳은 초음속 VTOL 전투기 EWR VJ 101」
네이버 블로그, 론리맨 「10-2 EWR VJ 101」
네이버 카페, 세계대전 떡밥수용소 「서독은 VSTOL은 실패하고 영국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임?」
Wikipedia 「EWR VJ101」
Diseno-art.com, 「EWR VJ 101 Supersonic VTOL aircraft」
The Aeronautical Journal, Adventures and ventures in the Italian aircraft industry (2016)
Avia Deja Vu, EWR-Sud BJ-101
'무기체계 > 유럽공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후 서독 공군 (1956) (0) | 2023.10.07 |
---|---|
이탈리아 Fiat G.95 (1963) (1) | 2023.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