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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피신 관련 메모 본문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렸다. 그는 국군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자 3일에 두 자녀 김정일과 김경희를 포함한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란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이 군단별로 38도선을 모두 넘어선 11일 저녁 김일성은 라디오로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몇 시간 뒤인 12일 새벽 그는 스탈린이 선물한 고급 리무진을 타고 비밀리에 도주하기 시작했다. 평양이 함락되기 일주일 먼저 도망을 친 것이다.
북한 라디오에선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지역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연설이 반복적으로 방송됐다. 김일성은 도주 중이던 16일에 또 '각 군단, 사단들에선 독전대를 즉각 조직해 도주하는 자들을 즉결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하달했다.
북한이 정한 제2의 수도는 강계였다. 김일성은 이곳에 주요 정부 기관을 보내곤 자기는 폭격을 당하기 싫어서인지 딴 곳으로 도주했다. 청천강에서 막히자 차를 버리고 평안남도 덕천을 경유해 평안북도 동창으로 산을 타고 이동했다. 마침내 25일 압록강변 창성에 도착해 11월 3일까지 머물렸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9년 동안 창성초대소 경비를 섰던 974부대 출신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김정일은 가족과 미녀들을 데리고 창성에 가 은신했다. 이는 김일성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도주로도 완벽히 구축했다. 평양 ~ 향산 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향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꺾어 창성까지 몇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북한에서 최상급인 이 고속도로는 6.25 전쟁 시기 김일성의 도주 경로와 동일하다.
특히 1980년대 건설된 향산과 창성을 연결하는 약 150km 길이의 '1호 도로'는 폭이 9m나 되는데, 김 씨 일가만 사용할 수 있다. 일반인이 도로에 올라서면 경비를 서는 974부대에 즉시 체포돼 처벌된다.도로 양옆에 높은 잎갈나무를 심어 정찰기에 차가 보이지 않게 했다.
2024년 10월 1일 화요일 동아일보, 국군 북진이 만든 창성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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