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rchive
1870~80년대 한국사 본문
1873년 최익현의 <계유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다.
1875년 09월 20일 운요호 사건
1876년 0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연안 측량권 및 치외법권)
곡물 무제한 유출이 가능했고, 관세가 붙지 않아 일본 물품이 조선에 마음껏 들어올 수 있었다.
부산(99), 원산(80), 인천(83) 등의 항구를 개항하도록 했으며 일본 화폐로 거래가 가능했다. 단, 내지무역은 허용하지 않았다.
최혜국 대우가 포함되지 않았다.
1878년 두모포 수세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쌀이 빠르게 유출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함께 더욱 어려워졌다.
1880년 08월 수신사를 통해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가져옴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 설치 (조선의 개혁기구) > 훗날 등장하는 통리아문, 군국기무처, 교정청 등과 헷갈리면 안된다.
1881년 미국과의 교류하는 것을 반대하는 영남 만인소
1881년 01월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파견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 체결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최혜국 대우 조항이 들어완다.
이밖에 조정거중 및 관세도 처음 다뤄진다.
1882년 07월 23일 임오군란 발발 (음력 06월 05일)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는다. (내지무역 허용, 치외법권 인정)
그리고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하며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한다.
1882년 08월 30일 제물포 조약 (공사관 피해에 대한 보상 및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04일 갑신정변 발발 (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의 개혁 정강: 신분제 폐지. 호조를 통한 재정일원화. 조세 개혁 등을 주장함.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다시 청나라 군대가 이를 진압하면서 청의 내정간섭은 심해졌다.
1885년 01월 0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 요구 및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04월 18일 톈진조약 체결 (조선 출병 시 상호 통지할 것)
'취업준비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일성 피신 관련 메모 (2) | 2024.10.05 |
---|---|
고구려 삼국통일 실패 원인 (2) | 2024.09.17 |
16대 인조 (1623 ~ 1649) (1) | 2024.03.04 |
15대 광해군 (1608 ~ 1623) (1) | 2024.03.01 |
1860~70년대 한국사 (흥선대원군) (1) | 2023.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