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rchive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개발 본문
1947년에 독립한 인도는 원래 핵개발에 관심이 없었고, 핵개발에 대한 의지가 없는 나라였다.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와 샤스트리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이어나가야 한다며 핵개발을 지양(nuclear taboo)했다. 실제로 네루 총리는 1957년 1월에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원자력 에너지를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신, 미국이나 소련으로부터 핵우산을 보장받고자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과 동맹 관계였던 미국은 인도의 부탁을 거절했고, 소련은 중국과 불필요한 자극을 일으키지 않고자 인도의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인도는 1960년대 일어난 3차례의 사건들로 핵개발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어졌다.
1962년에 중국과 인도가 카슈미르 동부지역 악사이친을 두고 다투었다. 결과는 중국의 승리였는데, 이때 인도가 패배한 것을 지켜본 파키스탄은 혼란을 틈타 1965년에 인도 지배 아래에 있는 카슈미르 지역을 침공한다. 그렇게 1965년에 일어난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은 손쉽게 카슈미르 지역을 수복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인도의 승리였다. 한편, 1964년에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 보유국이 된다.
이와 같은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인도는 자국 안보에 대한 걱정이 심화되었다. 이에 인도는 '핵무장은 하지 않되 핵 선택권을 보유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결정을 내린다. 인도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인도는 언제든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음은 보여주되 실질적으로 핵무기를 생산하여 보유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곧바로 핵개발에 착수하여 1974년 5월 18일, 라자스탄 주 포카란의 지하 핵실험장에서 '미소 짓는 부처(Smiling Buddha)'라는 이름으로 히로시마와 비슷한 규모의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한다. 참고로, 이 날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아시아에서 중국의 핵 독주가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인도가 핵실험을 준비하자 미국은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경제 제재를 가했다. 캐나다는 기술 지원을 중단했고, 미국은 원료 공급을 중단했다. 동시에 소련은 1969년에 중소 결렬 이후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인도에게 핵우산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과학계와 종교계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며 대립하는 등 혼란스러웠던 나머지 인도는 1974년 핵실험 이후 핵무기 개발을 진행할 수 없었다. 추가로, 대만이 1971년에 유엔을 탈퇴하며 UN 상임이사국은 소련, 프랑스, 미국, 영국, 중국이었던 시기였으므로 인도의 핵실험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아닌 나라가 실시한 첫 핵실험이었다.
인도의 핵실험이 1960년대 중국과 파키스탄과의 마찰, 그리고 중국의 핵개발 때문이었다면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1970년대에 시작된다. 1971년에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미얀마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한다. 그리고 이때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미국은 미온적인 태도로 파키스탄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파키스탄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게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에 파키스탄의 4대 대통령 알리 부토는 "풀을 뜯어먹으며 살지라도 우리는 핵을 가져야 한다."는 발언으로 핵개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러자 미국은 1976년에 프랑스로부터 핵폐기물 재처리 시설을 들여오려는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했다. 그리고 파키스탄으로 헨리 키신저를 급파하여 파키스탄을 설득해보고자 했는데, 이미 파키스탄은 더 이상 미국에 의지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래서 되려 미국 대신 적(인도)의 적(중국)은 나의 동맹이라는 말처럼 중국과 손을 잡는다. 중국과 손을 잡은 파키스탄을 곱게 볼리 없었던 미국은 1979년 11월 21일, 파키스탄 내 미국 대사관에 방화 사건을 기점으로 파키스탄과 앙숙 관계가 되었다. (미국이 이슬람의 메카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마스지드 알 하람'을 공격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보도되자, 격분한 파키스탄 사람들이 이슬라마바드의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운 것이다.)
그런데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자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의 친소 공산 정권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프간은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아프간 내 이슬람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무너뜨릴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러자 미국은 소련을 규탄하며 비밀리에 아프간 이슬람 반군 세력이자 성전(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하는 '무자헤딘'을 지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은 미국의 훌륭한 전초기지가 되어주었다. 파키스탄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무기와 철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미국을 도왔다. (참고로, 인도는 외교적으로 모스크바 즉, 소련을 지지했다.) 이러한 모종의 거래 덕분에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었고, 그 결과 파키스탄은 1985년에 우라늄 농축에 성공한다. 동시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 10월,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부정하며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지속하라고 승인했다.
그 사이 1989년 2월에 소련은 10년 동안 5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아프간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미국은 그제서야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비난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중국이 파키스탄에 핵탄두 설계와 우라늄 재처리 시설 등을 제공하며 핵개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자 뒤늦은 미국의 핵개발 관련 제재는 소용이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전쟁 이후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들의 사령관을 수상으로 하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다.
한편, 1980년대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주시하고 있던 인도는 과거 '미소짓는 부처'를 기반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다. 자신들이 핵무기를 언제든 개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 파키스탄이 핵개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또는 적어도 파키스탄보다 우위에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이 보란 듯이 핵실험에 성공하니 핵무기를 보유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렇게 1998년 5월 11일, 인도는 작전명 샥티(Shakti) 아래 3개의 핵탄두로 핵실험을 실시했고, 13일에는 추가로 두 발을 더 터트렸다. 이에 질세라 파키스탄도 같은 해 5월 28일에 핵실험으로 인도의 핵실험에 대응했다. 이에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규탄하고 경제제재를 내렸다. ('Shakti'란 산스크리트어로 '신성한 힘'을 뜻한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알카에다에 의해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일어났다. 냉전 이후 생각지도 못한 테러에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때 내륙 지방인 아프간을 침공하기 위해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전쟁에 협력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이때 리처드 아미티지 미 차관보가 파키스탄 정보부 수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약 테러리스트들의 편을 들면 파키스탄을 폭격해 석기시대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는 일화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렇게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협조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미국은 이들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어주었다. 동시에 미국 입장에서 인도의 핵무기 보유는 중국을 압박할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비공식 핵보유국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파키스탄은 미국에 협조하나 표면적으로만 협력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전략적인 이유에서라도 아프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파키스탄은 인도가 동쪽에서 공격해 올 경우 퇴각할만한 내부의 전략적 깊이(국토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다)가 없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 국경에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의 거리가 400 km가 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400 km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400 km 정도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된다.) 게다가 지형도 대체로 평탄하여 마음만 먹는다면 인도군은 재래식 전력만 투입해도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 입장에서는 서쪽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이 중요하다. 인도가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퇴각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인도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아프간의 카불 정부가 자신들의 적의 적이 되길 바란다.
참고자료
유튜브 지식한잔,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
유튜브 지식한잔, 파키스탄은 왜 인도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유튜브 지식한잔, 완전 치열했던 방글라데시 탄생 과정
유튜브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허락한 핵무장 인도의 핵개발
유튜브 지식해적단, '핵vs핵'으로 대치중인 지구 최악의 관계
시사상식사전, 탈레반
나무위키, 무자헤딘
나유뉴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인도 항공모함 '인생 한방' 스토리
쭈녕, 지리의 힘. (9) 인도, 지리적으로 출발부터 유리했다. 파키스탄, 말썽 많은 아프간과 국경을 물려받자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