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삼국통일 실패 원인
첫 번째, 백제와 신라를 한 번에 압도할 정도의 강력한 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으므로 위 주장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두 번째,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선비족이 세운 강력한 후연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서기 500년, 5만 군사를 데리고 신라로 출정하여 신라를 완전하게 자신의 영향권에 두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후연이 고구려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신라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났다.
장수왕 때는 선비족 중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가 중국 화북지역을 통일하며 등장한다.
그래서 고구려는 항상 북위를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평양성은 국내성보다 북위로부터 멀어 보다 안전했다. 460년대가 되어서야 북위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던 사이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내정간섭)에서 벗어난 것이다. 450년대 초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를 모두 살해하고 말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나제동맹을 결성했다.
475년 백제를 기습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괴로왕을 살해했다.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여 백제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으나 장수왕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할 수 없었다. 이유는 북위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기 때문에 함부로 백제를 끝까지 쫓아가 멸망시킬 수 없었다. 481년 장수왕은 백제와 같은 방식으로 신라를 무너뜨릴려고 했다.
그러나 나제 동맹과 가야군, 즉 3군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그렇게 5번의 주요 전투에서 모두 패배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나제 동맹을 파훼하고자 했으나 점점 견고하게 동맹을 맺어가며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 심지어 바다 건너 남조와 북위, 왜를 끌여들여 고구려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중국 왕조의 존재는 고구려에게 엄청난 핸디캡이었다. 더불어 백제와 신라가 생존을 위해 유기적으로 고구려에 대응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고구려는 삼국통일의 적기를 놓치게 된다. 이후로는 불안정한 고구려의 정치 상황 때문에 내적 혼란과도 맞서 싸워야했다.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 국내성 기반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이 약해질 것을 이유로 평양성 세력과 갈등을 빚고,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장수왕은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그나마 강력한 군주의 통제로 고구려는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설령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모두 극복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단순하게 백제와 신라를 침략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완벽하게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점령지에 자신들의 군대를 주둔 시켜야 하는데, 이를 중국 왕조가 가만히 두고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고구려의 북쪽 국경이 허술해지는 것을 중국 왕조가 가만둘리 없기 때문이다.
별별역사, 고구려는 왜 전성기 때 삼국통일은 하지 못했을까?
도서, 한국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