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체계/공중급유

영국 공중 급유기 1편

빛나는 전구 2023. 5. 21. 14:00

오래전부터 미국과 긴밀히 교류해 온 영국은 1930년대부터 항공우편 등 다양한 항공산업이 존재했다. 그래서 영국은 자연스럽게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로 공중 급유 기술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Cobham 경이 있었다. 그는 1934년에 'Flight Refueling Ltd, FRL'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공중 급유 기술을 발명했다. 덕분에 영국은 Grappled-Lopp hose 시스템을 개발하여 미국의 공중 급유기 전력화에 상당 부분 일조했다. 더 나아가 파일럿이 보다 쉽게 공중 급유를 할 수 있도록 개발된 Probe and Drogue 시스템은 현재 미국이 개발한 플라잉 붐 공중 급유 방식과 함께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플라잉 붐은 고가인 데다가 복잡한 시스템을 요구해 미국을 제외하면 다른 국가에서는 운용되지 않는 반면 영국이 고안한 프로브 앤 드로그 방식은 저렴하고 구성이 간단해 미국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들이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공중 급유 기술을 가장 활발하게 고안하고 개선한 것과는 별개로 영국은 공중 급유기 개발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일본 본토 폭격을 지원하기 위해 600여 대의 Lancaster 폭격기를 공중 급유기로 개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황폐해진 영국은 소련을 공격한다는 개념보다는 소련의 폭격기로부터 본토를 지킬 수 있도록 요격기나 미사일을 중심으로 하는 방공망 구축에 힘썼다. 그리고 항공모하믈 건조하여 소련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국처럼 모스크바를 타격하는 수단을 확보하기보다 공격 수단을 갖추더라도 어디까지나 소련이 자신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쟁 억지력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과 달리 영국은 모스크바와 가까웠다. 따라서 장거리 타격 수단의 일환인 공중 급유 전력 확보는 영국 입장에서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 패권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보다는 전후 복구에 신경 써야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본토는 아무런 피해 없이 막대한 군수 물자를 생산하며 전쟁 특수를 누린 덕에 막대한 군비 증강을 이뤄낸 미국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945년에 이뤄진 영국 총선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노동당의 애틀리 후보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한 것이다. 영국 국민들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지쳐있었고 이때 노동당의 사회복지정책은 피폐한 삶에 지쳐 있었던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다가올 소련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처칠의 모습이 전처럼 반갑지 않았다. 이후 노동당의 애틀리는 모든 것이 황폐화된 유럽에서 한동안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 국방비보다는 국민 복지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민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앞서 말했듯이 미국과의 교류를 위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영국의 공중 급유 기술은 민간 항공산업에 접목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형 항공기와 관련한 기술들이 급격하게 발전했다. 특히 미국은 B-29 폭격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폭격기와 수송기를 개발했다. 이들은 공중 급유 없이도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었으며 세계 곳곳에는 이들을 위한 큰 규모의 활주로들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항공기 제작업체들은 전후 생산된 폭격기나 수송기를 여객기로 개조하여 영국에 판매했다. 그래서 영국 내에서 공중 급유 기술은 큰 문제가 없었음에도, 어쩌면 훌륭했음에도 영국 항공사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미 미국으로부터 걸출한 여객기들을 도입하는 것이 더 편했다. 그래도 1948년에 일어난 베를린 봉쇄 사건으로 민간으로부터 거절당한 공중 급유 기술은 공수 작전에 적용되어 그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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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러 모로 공중 급유기를 개발할 이유가 없었던 영국이 공중 급유 기술을 꾸준히 개선하고 개발했던 이유에는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동맹국들도 공중 급유 능력을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 중 영국이 공중 급유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길 원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의 Cobham은 파일럿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공중 급유 시스템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프로브 앤 드로그 시스템이다.  프로브 앤 드로그 시스템은 과거 급유를 받고자 하는 기체가 급유 호스를 늘어뜨리면 공중 급유기가 그 호스를 잡아 자신에게 연결하는 방식과 달리 공중 급유기가 급유 호스(드로그)를 늘어뜨리면 피급유 기체가 프로브를 꽂는 방식이었다. 영국은 1949년 8월 7일에 처음으로 Lancaster 폭격기에 이 시스템을 적용하여 영국의 첫 제트 전투기였던 Gloster Meteor F.3 전투기에 대한 공중 급유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미 공군은 영국의 프로브 앤 드로그 시스템에 만족하여 곧장 자신들의 공중 급유기에 적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