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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인조 (1623 ~ 1649)

빛나는 전구 2024. 3. 4. 10:00

16대 인조 (1623 ~ 1649)

시대상황: 친명배금 정책

 0)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일으킨 난이다.

 1) 1627년 정묘호란 이후 금나라와 형제관계를 맺는다. (정묘화약)

 2) 1636년 병자호란 이후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는다. 삼궤고두

 3) 1635년 조세 제도의 일환으로 영정법을 실시한다. 이제부터 1결당 쌀 4 ~ 6두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참고사항 1

정봉수와 이립이 크게 활약했다. 병자호란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듯 하다. 정묘호란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유튜브를 확인하면 좋을 듯 하다. 이괄의 난은 조선의 북방을 지키는 정예 기동군이었다. 그러다보니 이괄의 난 진압 이후 조선의 북방 방어선은 크게 약화되었다. 인조의 강화도 몽진으로 후금군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기 어려워져 후금은 정묘화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냈다.

 

국립진주박물관, [병자호란 특별전] 병자호란의 전초전, 정묘호란이 발발한 몇가지 이유

링크: https://youtu.be/hX8qOzuSsUg?si=wZJn76GFGgyRZQez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81부 동아시아 전쟁사 정묘호란

링크: https://youtu.be/vrLtfRX0hlI?si=xcrRluQFZncv-A77

 

참고사항 2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최명길과 주전파의 김상현이 대립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도움을 준 명나라를 배신하고 금나라를 섬길지 논쟁을 하는 동안 의주에서는 임경업, 광교산에서는 김준룡, 그리고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패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궤구고두례를 해야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금나라로 끌려 갔다.

 

참고사항 3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즉위하였으나 명나라로부터 왜 멀쩡한 광해군을 폐위시켰느냐며 인조를 쉽사리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인조는 즉위한 이후 22개월 동안 왕사 책봉 고명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인조는 뇌물을 써야만 했는데 이때 인조가 명나라에 사용했던 뇌물의 양이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사용한 은의 총량을 능가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결국, 인조는 즉위한 지 2년 뒤에서야 명 조정으로부터 조선의 왕이라 인정 받게 된다. 동시에 이는 반대로 광해군이 서인들의 비난과 달리 나름 명나라로부터 인정 받는 왕이었다는 점, 그만큼 괜찮은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것을 반증한다.

 

참고사항 4

조세는 인조 때 영정법을 통해 바뀌었고, 공납은 광해군에서 숙종에 걸쳐 대동법 시행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역은 영조 때 균역법을 통해 바뀌게 된다. 조선 시대에 어떻게 세금을 징수했는지, 어떤 왕에 의해 어떤 정책이 펼쳐졌는지 기억해두어야 편하다.